'한식'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7/04/11 한식날에

한식날에

마음의 편린 2007/04/11 20:41
한식날.
아내와 함께 부모님 묘소에 성묘를 다녀왔다.
애들도 함께 갔으면 했으나 모두들 바쁘시단다.
이럴 땐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도 화를 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래봤자 달라질 게 없을것 같아 그냥 입을 다문다.
(나는 현명한가 비겁한가)

아버님 돌아가신지 얼마 안된것 같은데
묘비를 보니 벌써 12년이 지났다.
어머님께선 아버님 돌아가신 뒤 꼭 10년을 더 사셨구나.
두 분을 생각하면, 특히 어머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한쪽 가슴이 저미어 온다.

아버님은 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버님이 암에 걸렸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때
서울 진해 등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부모님 몰래 대전에서 만났다.
아버님이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이 황망스런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막내 여동생은 벌써부터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우린 아버님이 이제 오래 사실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아버님께 스스로 삶을 정리하실 시간을 드리되
의사로부터 최후통첩이 오기까지는
아버님은 물론 어머님에게도 이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그러나 아버님은 매우 지혜로운 분이시다.
나는 지금도 아버님 어릴적 친구분들이 아버님에게
"너만은 크게 될줄 알았는데 겨우 이정도밖에 안됐냐"며
핀잔(?)하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그만큼 아버님은 주위로부터 크게 기대를 모았던 것 같다.
그러나 꿈을 안고 무작정 서울로 가셨던 아버님은
불의의 사고로 낙향을 해야 했고
시골로 온 뒤에는 다만 살아남은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평범하게 사셨다.
아버님은 친구분들이 "너도 별수 없구나"하는 식으로  농담을 할때마다
그저 말 없이 웃으시고는 했다.
씁쓸하던 그  표정이 지금도 떠오른다.

그러셨던 아버님이신지라
뭔가 이상해진 우리 태도만으로
본인이 치명적인 병, 바로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아채셨다.
처음엔 암이라 하더라도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러나 얼마 살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형수님을 불러 유언을 하시며 많이 우셨다 한다.
그리고는 마음을 다잡으시고
사후에 대비한 준비를 해나가셨다.

아버님이 하신 일은 모두 어머님을 위한 것이었다.
어머님은 수도료 전기료도 어떻게 내는지 모를만큼
모든걸 아버님께 의지하셨다.
그래서 은행 이용하는법 등을 어머님에게 가르치는 한편
어머님이 평생 궁하지 않게 돈을 만들어 통장에 넣어주셨다.
또 어머님 혼자서 살아가시는데 불편이 없도록
집안 이곳저곳도 손을 보셨다.

유언도 딱 한가지 였다.
"어머니를 억지로 모셔가지 마라.
어머니가 하자는 대로 해드려라"
이것이 전부였다.

겉으로는 어머님이 자식들 집에 가봐야 아파트 생활이 답답하실 것이니
친구분들이 많은 고향집에 사시는게 좋을거라는 것이었으나
실은 자식들이 미덥지 않은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괜히 미안하고 부끄럽다.

아버님은 내가 병문안을 다녀온 바로 다음날 돌아가셨다.
그때만 해도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줄은 몰랐다.
그 날 아버님을 병원 목욕실로 모시고 가 머리를 감겨 드렸는데
앙상해진 몸을 마치 어린애처럼 온순하게 내게 맡기시는 것을 보고
속으로 눈물이 났었다.

이버님이 어떤 분이셨던가.
자기 자신에겐 모질만큼 엄격하신 분이셨다.
나는 아버님이 병으로 쓰러지기전까지 누운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나보다 일찍 일어나고 나보다 늦게 주무셨다.
늘 무언가 일을 하셨고 졸아도 앉아서 졸으셨다.
그만큼 강한 분이셨다.

죽음은 비록 예고된 죽음이라도 느닷없는 모양이다.
최후의 순간이 왔을때 아버님은 매우 놀란것 처럼 보였다 한다.
눈빛이 몹시 당황스러워 보이더라고.
그러나 곧 체념하시더란다.
죽음을 받아들이는것 처럼
이내 스르르 눈을 감으셨다 한다.

이버님의 돌아가신 모습은 너무도 평화스러웠다.
젊은 시절 미남 소리를 많이 들으셨다더니
세월의 흔적이 사라진 얼굴은
참으로 단아하셨다.

아버님의 죽음엔 별로 눈물이 나지 않았다.
미리부터 각오를 하기도 했거니와
당신도 이미 생사를 넘어서 계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님은 다르다.
어머님이 그렇게 빨리, 작별의 말씀 한마디 없이 돌아가실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머님이 응급실로 실려가시기 전날
언제나처럼 안부 전화를 드렸었다.
그날도 어머니는 나에게
어제만 해도 감기가 심해 너무 힘들었는데
오늘은 살만 하다며 걱정말라고 하셨다.
어머님 목소리가 너무 작고 힘이 없어서 불길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어제보다 낫다는 말을 믿었다.
(아니, 무정한 나는 믿고싶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예전같지 않게 꺼져들어가는 목소리에 뭔가 불안했었다.

그런데 다음날 시골 누이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머님이 너무 아프셔서 대전 응급실로 모셨다고.
놀라서 형제들이 모두 대전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병원의 진단은 페렴.
폐렴이라는 말에 우린 모두 안심을 했다.
폐렴이야 항생제 주사 한방이면 끝나는거 아닌가.

노인들에게는 폐렴이 그처럼 무서운 병이라는걸
그때는 몰랐다.
우린 별일 아니라는 듯 웃고 떠들었으며
어머님을 엄살 마시라며 놀려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느때와 달리 웃지 않으셨다.
우리에게 왜 왔느냐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예전 같으면 우리를 보자마자 왜 왔느냐, 어서 가라고 했을텐데.
(어머니는 그때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셨던 것일까.)

어머님이 너무 호흡을 힘들어 하시자
의사가 인공호흡기를 달자고 했을때도
우린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편하시다면 그렇게 해드리는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아, 그러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어머니는 이후 아무 말씀도 하지 못하신채
그대로 떠나시고 말았다.
입원하신지 1주일 만이었다.
이렇게 황당할 수가 있을까.
도무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걸 실감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삶에 대해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셨다.
옛날, 당시만 해도 투기에 가까웠던 인삼농사를
아버님을 졸라 짓도록 한 것도 어머님이시다.
(그때부터 우리집 살림이 폈다)
한여름 무더위속 인삼밭에서
빨갛게 익은 얼굴로 다정하게 흙을 다독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머님은 무슨 일을 해도 그처럼 정성을 다하셨다.
특히 자식, 그 중에서도 나에 대한 사랑과 정성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렇지 않으냐고 절대로 말하지 마라.)
성질이 나쁜 나는 툭하면 어머니에게 대들었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나에게 져주셨다.
정 화가 나면 혼자서 우셨다.
못된 나는 얼마나 어머니를 울렸던가.

어머니는 젊은 시절엔 아버지를 몹시 무서워하셨다고 한다.
아버님의 까다로운 성품을 못견뎌 도망갈 생각까지 하셨단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고로 폐인이 되다시피 해서 시골로 내려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아버님은 고생하는 어머님이 미안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어머님을 끔찍이 아껴주기 시작했고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오히려 어머님이 아버님을 '구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때도 싱글벙글, 오히려 구박을 즐기는 듯 하셨다.

그런 두 분의 모습을 보는건 은근히 즐거운 일이었다.
두 분이 싸움 아닌 싸움을 하면 우린 어머님께
다음 생에서도 아버지와 살거냐고 장난스레 묻곤 했다.
그 때마다 그런 소리 하지도 말라며 손사레를 치시던 어머니.
그러나 정작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여보, 나좀 빨리 데려가줘요'  하며
아버님 영정 앞에서 목메어 우시던 어머니.

두 분은 지금 그 곳에서 다시 만나
함께 웃고 계실까.
top
TAG

Trackback Address :: http://www.eltalk.net/trackback/69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