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

영농일기 2019/07/13 13:33
고추가 커지면서 낙과가 많이 생기고 있다.
3단적화를 하면서 너무 많은 꽃들이 피어
채 열매를 맺기도 전에 우수수 떨어지는가 하면
어른 손바닥만큼이나 큰 고추들도 연일 떨어지고 있다.
자세히 보면 구멍이 나 있고
그 구멍으로 물이 스며들어 곯아버린 것도 있다.
알고보니 이미 꽃이 필때 벌레가 들어가 파먹다가
성충이 되어 구멍을 뚫고 나온 것이라 한다.

나는 매일 고추를 들여다보면서도
저절로 떨어지는 고추 외에는
상한 고추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어쩌다 농장에 나오는 아내는
밭에 들어서자마자 상한 고추를 찾아낸다.
한번에 수십개나 되는 상한 고추를 따내면서
아내는 내가 엉터리 농부라고 나무란다.
매일같이 밭에 나가면서 도대체 뭘 보느냔다.

정말 난 왜 상한 고추들을 발견하지 못할까?
농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큰다는데
고추들 잘 크라고 일은 않고
발자국 소리만 요란하게 냈던 걸까?

게을러서 세밀하게 살피지 못한 것도 있지만
어쩌면 상한 고추를 일부러 찾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잘 키운 고추들이 뒤늦게 곯아 떨어지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가.
얼마나 화가 나고 걱정이 되던가.
그래서 아예 보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낙과를 매일, 하두 많이 보다보니
이제 숨어있는 상한 고추들이 내 눈에도 보인다.
이들은 이미 낙과가 될 운명이었지만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고추들이 떨어질까?
지금 피어있는, 앞으로 피는 꽃들도
상당수는 벌레의 공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화학농약을 쓰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의 손실은 각오했었다.
3단적화로 무수히 피는 꽃들이 모두 고추가 되길 바라지도 않고
익은 고추 얼마쯤은 벌레들과 나눌 생각도 했다.
그러나 감당 못할 만큼 손해가 커진다면......

그런들 어쩔 것인가?
잘되든 못되든 다 내가 한 일이고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이니
마음 쓰지 말 일이다.
마음은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不可得한데
어느 마음에 마음을 쓸 것인가?

그래도,
이러다 남는 고추나 있을지
걱정을 그칠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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