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일상 속에서 2019/06/30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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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밖으로 보이는 빗속의 텃밭이 참 싱그럽다.

비 오는 날
농장 하우스에 앉아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건
귀농 뒤 얻은 큰 즐거움 중의 하나다.

어제 일을 마치고 집에서 쉬다가
아내에게 갑자기 농장에 가자 했다.
가서 빗소리를 들으며 커피 한 잔 하자고.

어쩐 일인지 아내도 선뜻 따라 나선다.
정작 아내와 함께 가려니
아무래도 빗소리 보단 음악이 좋을것 같다.
미니 오디오를 들고 가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다.

그런데 아내가 문득
"우리 여기서 저녁 먹을까?" 한다.
냉장고 속 삼겹살을 가져다 구워 먹잔다.
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아내는 집으로 저녁 준비를 하러 가고
나는 즉시 숯불 피울 준비를 했다.

빗 속의 커피 한잔이
따뜻한 저녁과
소주 한 잔으로 바뀌었다.

비는 종일 내리고
어느새 어둠도 내리고
얼큰한 내 마음 촉촉이 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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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일상 속에서 2019/06/09 09:22
어제 남우와 두희가 왔다.
자식들이라고, 우리가 어찌 사는지 보러 온 것이다.
아이들이 큰 뒤 부터
함께 살면서도 같이 밥을 먹은 적조차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제 뿔뿔이 헤어진 뒤에,
그것도 멀리 이곳 시골에서 온 가족이 함께 하게 되니
참으로 감회가 깊다.

나는 그저 반가운데
아이들은 아직도 좀 서먹한가 보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들 기억 속의 내 모습은
늘 찡그린 표정일 것이다.
특별히 자기들에게 기분 나빠서가 아니라
내가 만사에 심각했기 때문인데,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알 리 없다.
나 또한 내 표정이 그토록 차갑고 심각한 줄
아주 늦도록 몰랐었다.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당시 나는 언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아내도, 아이들도 모두 뒷전이었다.
그 모두가 사실은 나의 욕심, 나의 헛된 승부욕이었건만.....
뒤늦게 이를 알았을때
아이들은 이미 너무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보내버린 시간들이
지금도 너무 후회스럽다.
아내, 특히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그러나 아내와 달리 아이들은
이미 실 끊어진 연 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진 편이다.
특히 남우는
여전히 굳은 표정에 말이 없지만
누구보다 속정이 깊다.
내가 대전으로 자의반 타의반 내려갈 때부터
참으로 세심하게, 온갖 배려를 해주더니
얼마전에도 무슨 바베큐를 보내왔더라.
엄청 맛있다고 소문났다며 드셔보시라고.

두희도 앞으로 달라질까?
우리에게 잘 하기 보다
제 길이라도 좀 편하게 갔으면 좋겠다.
늘 씩씩한 척 하지만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 늘 불안불안하다.
우리 두희, 좀 덜 전투적이면 좋겠다.

토종닭을 사다가 농장에서 닭죽을 만들어 먹다.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 먹으니
고기도 맛있고 술도 맛있다.

오늘 아이들이 모두 돌아갔다.
올 때보다 표정들이 편해져 좋다.
신에게 감사한다.

앞으로 이곳을
아이들이 언제나 찾아와 쉴 수 있는
최고의 쉼터, 최후의 의지처로 가꿔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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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일상 속에서 2019/05/18 15:55
어제 남우가 이사를 했다.
그보다 이틀 전엔 두희가 이사를 했다.
내가 지난달 29일 이사를 했으니
불과 한 달 사이 온 가족이 따로 이사를 한 셈이다.

이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구나.
그러나 어차피 가야 할 길이었다.
남우는 남우 대로,두희는 두희 대로,
그리고 우리는 우리대로
모두 새 출발을 한다.

용감하게 집을 뛰쳐나갔던 남우는
이제 지난 날을 돌아보고 재정비를 할 때다.
지금껏 엄마와 살아온 두희는
이제 홀로 제 갈길을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
아내도, 평생 서울에서만 살아온 아내도
이제 시골 생활에 적응해야 한다.

나는 귀농한지 3년째.
그러나 올해도 실수의 연속이다.
농사엔 정해진 법이 없다.
최상승의 불법은 정해진 법이 없다지만
농사는 그야말로 제멋대로다.
작년에 이미 그렇다는 것을 알고
올핸 내 생각대로 하리라 작정했지만
경험이 없다보니 또 남의 말에 휘둘리고 말았다.

고추는 여전히 고전 중이다.
장대하게 큰 것도 많지만
성장이 미흡한 것도 그만큼 많고
오늘 내일 하는 고추도 수십 포기다.
아무래도 물주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점적호스를 한 줄씩 포기 가까이로 옮겼지만
효과는 별무신통이다.

텃밭에 심은 토마토 가지 호박도
모종 하루만에 잎들이 다 타서 떨어지고
새로 어렵게 잎을 틔우고 있다.
이러려면 뭐하러 모종을 심을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원인을 물어봐도
시원한 대답이 없다.

그제는 농기센터 황과장을 초대해 의견을 물었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건 알겠으나
그 문제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애꿎게 술만 잔뜩 마셨다.
센터 직원들은 술을 안 마셔
혼자서 대취헸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술김에 또 전화를 20여 통이나 했더라.

이 사람 저 사람 불러내
대체 무슨 말을 했을까?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을까?
한 말을 기억 못하니
내심 불안하고, 그런 내가 한심하고,
정말로 우울해 못 살겠다.

3년은 농사를 지어봐야 비로소 농부가 된단다.
나는 1,2년 안에 해 내겠다 큰소리 쳤는데
아무래도 3년 다 걸려야 할 듯하다.

아무려면 어떠냐?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빨리 간들, 멀리 간들
결국엔 모두 만난다.

우리 남우와 두희도 초조해 하지 말고
히루하루를 즐겁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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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일상 속에서 2019/04/10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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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서둘렀나?
고추 심을 준비를 마친지 벌써 여러 날이다.
막상 밭을 다 만들어놓고 보니
모종 심을 날만 기다리는 것도 고역이다.

그동안 미생물도 4차례나 주었다.
멀칭을 살짝 들춰보니
이랑에 곰팡이가 하얗게 슬었더라.
그만큼 땅이 좋아진 거?
글쎄....
미생물을 제대로 배양하기나 한 것인지 모르겠다.

참, 올해 농사 작물은 고추로 결정했다.
깻잎은 결국 안 하기로 했다.
남자가 짓는 농사론 부적절하고
경제성도 그다지 높지 않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창 값이 비쌀 요즘 한 박스에 1만원도 안 된다니
안 하기 잘 한 것 같다.

이곳에 내려올 때
깻잎은 무조건 한 번 해보고
여의치 않으면 고추를 심기로 했었다.
또 장기적으론 대추가 어떨까 생각했다.
앞으로 10년은 더 일하기로 했지만
갈수록 힘이 달릴 테니 대추농사가 대안일듯 싶었다.
올해 고추 농사를 지어보고,
농사 계획을 확정할 생각이다.
천황대추는 시험삼아 5그루를 심었다.

이사 계획도 확정됐다.
아내를 위해
지금 살고 있는 곳에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두배 넓은 집을
대출을 받아 샀다.
지금 리모델링 공사 중이다.
가능한 한 아내 마음에 들게 하려다 보니
예상보다 많은 비용이 든다.
그러나 즐거운 일이다.

올해 해결해야 할 일이 8건이나 있었다.
특히 이사를 하려면 6가지가 거의 동시에 풀려야 했다.
그것도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런데 이제 거의 모두 해결됐다.
필요한 순간에 신기하게도 문제가 해결된다.
신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신 것일까?
감사한 일이다.

덕분에 오랜만에 느긋한 마음이 됐다.
그러나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다.
이들은 모두 20일 이후에 몰려있다.
일도 때가 있다.
때를 기다리는 것도 또한 일이다.
그리고 모든 기다림은
설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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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온다

일상 속에서 2019/03/04 14:54
아내의 귀농 준비가 본격 시작됐다.
그동안 해오던 일을 모두 정리하고
이제 이사 준비에 들어갔다.
아직도 많은 문제들이 해결돼야 하지만
이제 돌아갈 길은 없다.

이렇게 결심을 해준 아내가
나로선 고마울 뿐이다.
그러나 부담도 그만큼 크다.
과연 아내가 이곳에서 행복할까?

아내의 귀촌은 엄청난 모험이다.
여자에게 가장 큰 모험은 결혼이겠지만
그땐 가족이나 친구가 모두 같은 서울 안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혈혈 단신,
가족과 친구는 물론 익숙한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
오로지 나만 보고 온다.
나이들어 결혼보다도 더 큰 모험을 하는 것이다.
어찌 부담이 되지 않겠는가?

내 뜻에 기꺼이 따라준 아내에게 보답을 하기 위해
처음엔 작지만 멋진 집을 지어 데려올 생각이었다.
집 지을 곳도 이미 마련했다.
그러나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전원주택이 보기엔 좋지만
살기에도 그렇게 좋을까?

무엇보다
작년 봄 외딴 농막에서 몇달을 살아보니
사람이 너무 그립더라.
나중엔 도둑놈이라도 좋으니
이웃에 누가 살았으면 싶더라.
그래서 땅도 금산의 명산 진악산 밑 동네에 마련했다.
그러나 아내는 의외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왕 시골에 오면 시골다운 곳에 살고싶단다.
아직 시골에 직접 살아보지 않아 그러겠지.
그러니 더더욱 집 짓기를 서두를 수 없었다.

그가 당장 머물 곳은 아주 오래된 연립주택이다.
1970년 국내 유일, 최초의 위성통신국이 들어서면서
직원들의 숙소로 지어진 곳이다.
금산에서는 첫 아파트인 셈이다.
농장과 가까워 일하기가 좋고
읍내와도 자동차로 불과 5분이내 거리다.
무엇보다 앞 뒤로 빈땅이 들판처럼 널직해
시골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더구나 바로 옆엔 10리나 뻗어있는 멋진 산책길이 있다.
집은 좀 후져도
아파트의 편리함과 시골의 넉넉함을(내 생각에)
함께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역시 아내에게 미안하다.

나이들어 아내와 무려 8년을 떨어져 살았다.
떨어져 살면서 아내를 다시 보게 됐고
늘 안스러움과 미안함을 느꼈다.
이제 다시 함께 살게 되면
우린 또 어떻게 변할까?

함께 살다 보면 소리도 나겠지.
가끔은 싸움도 하겠지.
그러나 결국 행복해야 하리라.
우린 우리의 인생을
다시 새롭게 써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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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일상 속에서 2019/01/22 14:37
새해도 1월이 벌써 다 가고 있다.
나는 농사철도 아닌데, 할 일도 없이
이곳에 내려와 있다.
지금 나는 공연히
시간만 죽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일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일주일에 두번씩 전시해설사로 알바겸 봉사활동을 하고
올 농사 계획도 짜고 있다.
농사 계획이야 그리 대단할 것도 없고
서울에서 짜도 그만이지만
아무래도 현장에 있어야 현실감도 있다.

그래도 요즘 심기가 편치 않다.
올 봄은 나의 인생 2막(혹은 3막)에
아주 중대한 기로가 될 것이다.
내가 드디어 농촌 정착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먼저 많은 문제들이
거의 동시에 해결돼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문제도 진전이 없다.
시간은 자꾸 가고,
정말 마음이 조급하다.

시름을 달래려
금강경 강의 책을 다시 읽다보니
이런 시가 나온다.

꽃잎이 떨어져 물은 붉게 흐르는데
일 없이 근심만 쌓이니
말 없이 동풍을 탓해본다.

인간은 하는 일 없이 한가로운데도 근심하고
탓할 것이 없으면 동풍이라도 탓한다는 것이다.
붓다는 그래서 사는 것 자체가 고라 했던가?

한시도 머물지 않고
걱정과 불안에 휘둘리는 마음.
선사들은 우리에게 거울같이 살라 한다.
사물이 다가오면 있는 그대로 응하고
지나가면 흔적을 남기지 말라.

오늘도 그리 살려 애쓰지만
마음엔 여전히
구름이 가득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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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일상 속에서 2019/01/01 1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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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내와 함께 남산에 올랐다.

새해 해돋이를 보러 나간것은
나에겐 매우 드문 일이다.
아마도 20여년 전 강릉에 간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올해는 혼자 생각할 것이 많았으나
모처럼 새해를 앞두고 함께 내려온 아내에게
해돋이 구경이라도 시켜주고 싶었다.

올해는 시골로 완전 이주할 계획이다.
지난 연말 서울에 올라가
아내와 상의를 끝냈다.
아내는 군말 없이 시골행에 동의했다.
본래는 단촐하나 멋지고 편한 집을 지은 뒤
아내를 불러올 생각이었으나
당장 집을 짓기엔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단 이사부터 하기로 했다.

불행히도 구름에 가려
해돋이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하산 길
해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황홀하도록 강렬한 햇살.
절로 환호성이 터졌다.

아내는 저 빛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무나 많은 숙제가 기다리고 있는 올해.
그 숙제들을 다 풀고
비상하는 한 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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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년회

일상 속에서 2018/12/30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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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노조 동지로서 함께 했던 때가 벌써 26년이란다.
이제 회사에 남은 사람은 이들 중 현미가 유일하다.
회사를 박차고 나갔던 사람들
억수로 고생하더니,
겨우 자리를 잡는가 했더니,
벌써 또 떠날 때들을 맞고 있는 것 같다.
그래, 시퍼렇던 우리의 청춘도
무려 26년이 지난 것이다.
그러나 어쨋든 모두들 잘 살아 남았다.
그래서 이런 만남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시골에 내려와 앞으로 참여가 쉽지 않겠지만
모두들 자주 만나는,
즐거운 모임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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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기의 친구들.
내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만난 사람들이다.
귀양살이 처럼 온 사람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들은 나에게 아무런 기대도 바람도 없이
그저 큰 위로와 힘이 돼주었다.
이젠 연락도 거의 없지만
그래도 1년에 한 두번은 함께 술을 마신다.
마시면 꼭 꼭지가 돈다.
오늘도 모두들 무사히 귀가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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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언 50년?
초딩 친구들이니 햇수로만 보면 60년지기다.
그러나 우리가 본격적인 모임을 가진 것이 1972년이니
올해로 46년인가?
본래 11명이었으나 유명을 달리한 친구도 있고
나올 사정이 안되는 친구도 있다.
그 대신 새로운 친구 둘이 생겼다.
만나도 항상 무덤덤한,
매사에 조심할 필요가 없는,
가장 편안한 모임이다.

여보게 친구,
기분이 알딸딸 하신가?
그럼 그냥 실수를 하시게나.
여기 아니면 어디서 마음놓고 실수를 할 수 있겠는가?

올해는 망년회가 잦다.
보통 2,3번에 몰아서 망년회를 하는데
올해는 7번 정도를 한 것 같다.
그만큼 모임이 다양해진 건가?

아니다.
예전엔 안 가던 망년회도 가기 때문이다.
예전엔 내 좋아서 망년회를 했는데
요즘엔 남 좋으라고 망년회를 간다.
이제 시골로 완전 이사를 하면
망년회 갈 일도 별로 없겠지?
어쩌면 그래서 내가 열심히 망년회에 참석했는지도 모르겠다.

내년엔 아내도 이곳 시골로 이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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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장

일상 속에서 2018/10/23 12:57
오늘은 상강.
서리가 내린다는 날이다.
서리가 내리면
깻잎 농사를 접어야 한다.
바람이 차가와지면서
노지 깻잎들은 벌써 들어갔고,
하우스만 얼마 남아 있다.

사람들은 날 보면
아직도 깻잎을 따고 있느냐고 묻는다.
겨울 하우스 깻잎들이 쏟아지고 있으니
나도 벌써 농사를 접어야 했나?

하지만 우리 깻잎은 아직 싱싱하다.
만져보면 어쩔 수 없이 노쇠현상이 보이지만
겉으로는 어느때보다도 오히려 빛깔이 좋다.
화학농약과 비료를 거의 안쓴 덕분인가?

그러나 늦어도 이달 안엔
나도 깻잎 농사를 접어야 하리라.
서리가 제대로 내리면
하우스 안이라도 깻잎이 죽는단다.
그러면 그때부터 무엇을 한다?
벌써부터 답답하다.

결산은 아직 안해봤지만
올 농사는 적자가 엄청날 것이다.
시설비야 어쩔수 없다지만
깻잎농사에 들어간 비용만이라도 건질 수 있을지.

누렇게 깻잎물이 든, 거칠고 투박해진 손을 보면
조금 착잡하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도
결과가 이 정도라니.
농부로서도 나는 별 가망이 없는 건가?

돌아보면 학창시절 빼곤 항상 최선을 다해 살았다.
(학창시절엔 책상 앞에 앉기가 얼마나 어렵던지.
공부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공부보다는 공상에 더 몰두했다.
팔팔한 청춘을 책상 앞에 붙들어 둔다는 것이
애초 잘못 아닐까?)
그러나 사회에 나온 이후엔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왜 항상 결과는 신통치 않을까?
그저 열심히 하는 것만으론 안되는 것일까?

학교와 책에서 배운대로 살았는데,
인류의 스승이라는 사람들이 시키는대로 살았는데,
다 그렇게 살진 못했어도
그렇게 살려고 무진 애는 썼는데,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아함경을 읽다 보니 붓다께서
'법대로 행하여서 얻지 못함은
비법으로 얻음보다 훨씬 나아라.
지혜가 많고도 낮은 명성은
적고도 높음보다 훨씬 나아라' 하셨더라.

그러니 나도
'백구야 너는 알리라' 하면서
혼자 자족하고 말아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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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일상 속에서 2018/09/15 16:31
새벽에 농장에서 일을 하는데
개구리의 괴상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
어디서 들어본 소리.
언제였더라?

열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시절.
고추밭에서 엄마와 고추를 따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고추 바구니를 팽개치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머리가 세모꼴인 뱀 한 마리가
입에 개구리를 물고 있었다.
내가 나타나자 뱀은
개구리를 문 채로 대가리를 쳐들고
나를 노려봤다.

죽음을 목전에 둔 개구리는
얼마나 무서울까?
그러나 뱀 아가리 속의 개구리는
눈만 꿈벅 꿈벅
이무런 표정이 없었다.
울음소리도 비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섭지도, 고통스럽지도, 슬프지도 않은,
아무 생각 없는것 같은
그 괴상한 울음소리.

그 울음 소리가
오늘 내 밭에서 들리고 있다.
그때 나는 다급하게 엄마를 불렀었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그곳에 가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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