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기

영농일기 2019/08/10 09:16
어제 건조기를 샀다.
뭐 건조할 게 있다고....
사나 마나 고민했는데
사고 나니 홀가분하다.

농사를 그만 두면 몰라도
내년에도 농사를 짓는다면
고추밖에 더 있을까?
그렇다면 건조기 마련을 미룰 이유가 없다.

또, 농촌에 살려면
건조기는 필수 인 것 같더라.
귀농 현장교육 때 가본 집 마다
건조기 없는 집이 별로 없었다.

건조기도 종류가 다양하다.
한일, 신일, 경동 등 대기업 제품도 있고
농기계 전문 중소기업에서 만든 것도 있다.
나는 무명 벤처기업 제품을 골랐다.
농사도 남들 하는대로 안해 애를 먹는데
건조기로 또 속 썩는 건 아닐까?
부디 그런 일은 없기를.

아내에게도 건조기는 매우 유용할 것 같다.
장난감 같은 플라스틱 건조기를 자주 쓰던데,
이제 무얼, 언제, 얼마나 말리든
빵빵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건조기를 사는 것으로
결정해야 할 일이 두 개 줄었다.
내년에도 농사를 지을 것인가?
그렇다.
고추농사에 재도전할 것인가?
그러려 한다.

그러나 고추 농사를 지어도
올해처럼 올인하진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풀어야 할 숙제가
아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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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수확

영농일기 2019/08/08 16:09
오늘 처음 고추를 땄다.
휑한 밭에서도
고추는 익더라.
휑해서 더욱
빛깔이 곱고 밝더라.

따다보면
어떤 게 익은 것인지
어떤 게 덜 익은 것인지
헷갈려 마구 딴다.

22kg쯤 될까?
제대로 땃으면 100kg은 됐을 텐데...
200kg은 따야 하는데....

아쉽기도 하지만
그래도 빈손은 아니지?
마음이 제법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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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깔

영농일기 2019/08/06 09:51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남들은 벌써부터 붉은 고추를 따고 있다는데
우리 고추들은 이제야 조금씩 익고 있다.
하우스 안인데도 왜 이리 늦을까?

그나마 성한 게 반, 벌레먹은 것이 반이다.
어쩌면 상한 고추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밭에 갈 때마다 벌레 먹은 고추를 한 가득씩 따내니
일을 해도 즐겁지 않다.
밭에 나가기가 두렵기까지 하다.

최소 일주일에 1번, 최근엔 2번씩 하는 등
남들보다 방제도 많이 했는데 왜 그럴까?
내가 만든 약제가 효과가 없는 것일까?
매뉴얼대로, 정성들여 만들었는데
본래 효과가 없었던 것인가?
내가 속은 것인가?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자주, 그렇게 많이, 그렇게 정성들여 방제했으면
이렇게 많은 고추가 상할 순 없다.
어린 고추부터 특급 크기의 고추까지,
심지어 수확 직전의 붉은 고추까지 떨어지는 걸 보면
속에서 울화가 끓는다.

벌레들도 참 염치가 없다.
어찌 그리 융단폭격하듯 파먹는가?
농약을 안 쓰면 동네 벌레가 다 몰려 온다더니,
왔으면 적당히나 하시지
어찌 이럴 수가 있나?

유기농 한답시고 고추들 고생만 시키는 거 아니냐고
동생이 나무랐었다.
아니라고, 남들 고추는 겉보기엔 좋을지 몰라도
농약에 절어 죽지 못해 사는 거라고,
그래서 조금 작고 못생겨도,
벌레에 조금 시달려도
차라리 우리 고추가 낫다고 변명했었다.

그러나 요즘엔 나도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고추가 갑자기 곯아 떨어지는 것을 보면
거의 예외없이 구멍이 뚫려 있다.
벌레가 속에서 파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주인의 쇠고집으로
이렇게 많은 고추를 곯아 떨어지게 하다니...
씻지 못할 죄를 지은 것 같다.

그래도 가끔씩 보이는 잘 익은 고추는
나를 설레게 한다.
빛깔이 너무 예쁘다.
다른집 고추 같이 그냥 빨간 것이 아니라
불타오르는 것 처럼 강렬하게 붉다.
(혹시 내 눈에만 그런가?}

내년엔 어떡하나.
다시 고추 농사를 지어야 하나?
또 다시 죄나 짓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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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땡이

영농일기 2019/08/03 09:49
요즘 가끔씩 밭에 나가지 않는다.
할 일이 없어도 마치 문안인사나 드리듯
그동안 아침 저녁으로 꼬박 꼬박 밭을 찾았었다.
그러나 이젠 아침, 혹은 저녁은 자주 거른다.
외지에 나가거나 불가피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없던 일이다.

땡땡이가 이런 것일까?
학창시절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 모르지만
히죽 히죽 웃으며 학교를 빼먹던 아이들이
이런 맛에 땡땡이를 쳤는지 모르겠다.

자신을 철석같이 믿는 자에게 배신을 때리는 듯한,
어쩌면 스스로를 배신하는 듯한
이 묘한 쾌감.

남들은 사흘에 한번,
어떤 땐 일주일에 한 번밖에 밭에 가지 않는다더라.
그래도 나보다 농사 잘만 짓더라.
그리고
농사 잘 짓는다고 잘 사는 것도 아니더라.

그제 용세 성님과 영철씨에게 점심을 샀다.
평소 술 한잔 사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나 안 죽었다는 걸 보여주고도 싶었다.

풋고추는 잘 팔았느냐고 묻기에
20상자에 10만원밖에 못받았다고 하자
어처구니 없어 하면서도 잘 받은 거란다.
농사 잘 짓기로 소문난 어느 귀농인은
어제 60상자 내고 7만 2000원 받았단다.

농사 잘 지으면 뭐하나?
한 상자에 달랑 1200원.
상자 값 1000원, 운송비 200 빼면 남는 게 없다.
60상자나 땄으면 인부를 썼을 텐데
그만큼 고스라니 손해를 본 것이다.
수확을 포기해야 할 판이다.

농사 잘 됐다고 웃을 일도,
안 됐다고 울 일도 아니다.
붓다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모두가 꿈이요, 환상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라고.

앞으론 하루, 혹은 몇일씩도 빼먹을 작정이다.
그렇다고 농사를 팽개치자는 건 아니다.
일 할 때는 열심히 해도
일에 얽매이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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