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사람들

시사 2019/10/04 09:35
어제 보수 야당의 대규모 집회가 있었다.
130만명을 동원한다더니
광화문에서 시청, 서울역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인파가 거리를 채웠다.
보수측 집회로는 사상 최대 규모다.
자한당도 놀랐을 것 같다.

몇일 전(9월 28일)엔 서초동에서
검찰 개혁을 촉구하는 집회가 있었다.
주최측은 10만명을 희망했으나
무려 150만, 혹은 200만명이 참여했다.
이들도 스스로 놀랐다.

어제 보수측의 대규모 집회는
서초동 집회에 자극받은 바 크다.
자한당은 서초 집회 참가자 숫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아무리 크게 잡아도 5만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렸다.
그래놓고 오늘 자기들 집회 참가자는 300만명이란다.
300만이 맞다면 서초 집회도 200만은 되지 않을까?

서초 집회에 200만 인파가 몰렸을 때
검찰개혁을 바랐던 나도 놀랍고 반가웠다.
그러나 마냥 좋지는 않았다.
검찰의 피의사실 유출과 언론의 무분별한 보도로
'조국 일가 죄질'이 과장됐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다고 무죄라고 주장할 수도 없지 않은가?
유죄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수백만명이 몰려가 법적 기관을 욱박지르는 것은
또 다른 파쇼 아니겠는가?

2,3만명 돼도 좋았으련만....
너무 많은 숫자에 나는 되레 가슴이 무거웠다.
촛불혁명 때는 집단지성이라며 찬탄했지만
앞으로 사사건건 머릿수로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 한다면
집단광기, 중우정치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어제 보수 집회를 보곤 웃음, 쓴웃음이 나왔다.
장관 하나 잡자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나오나?
조국이 뭐관데, 저리 사생결단을 할까?
국가 운명은 나 몰라라, 무책임한 선동과 악담만 퍼붓는 것을 보며
참으로 암담했다.
저런 자들이 어찌 정권 대안세력이 될 수 있겠는가?

보수 지원, 아니 문 정권 타도 선봉에 선 조선일보 또한 딱하다.
내가 언론계 현역일 때 조선일보는 교활하면서도 대단했다.
그때도 편파 왜곡 과장을 일삼았지만
나름의 명분과 논리를 갖춰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욕을 하면서도 속으론 감탄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자한당과 한통속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수준도 자한당 수준으로 떨어진 것 같다.
파리 한마리만 봐도 악에 받힌 듯 도끼를 휘두른다.
그러다 보니 논조 또한 천박하다.
과거엔 마피아나 삼합회 보스 같은 포스가 있었으나
지금은 초딩이 푼돈 뜯는 양아치 같다.
어쩌다 저리 됐나, 안쓰럽다.

자한당과 보수세력은
이번 집회로 자신감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숫자에서 늘 진보진영에 밀리던 열등감을
통쾌하게 날렸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서초집회와는 차이가 있다.
서초 집회가 자발적이었다면
광화문 집회는 동원 성격이 크다.
또 자한당과 뜻을 달리 하는 세력도 많이 참가했다.
자한당은 전국 지구당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참석 인증샷 제출을 지시했다.
태극기 부대와 극우 종교단체 등 이질적 세력도 대거 참여했다.
보수 라고 불릴 만한 모든 세력이 참가한 것이다.

그러나 동원된 사람만으론 300만 이라는 숫자를 설명하기 어렵다.
이들 외에 정치색이 없는, 순수 시민도 대거 참여했다고 봐야 한다.
그들은 누구일까?
자한당에 호의적이진 않지만 조국에 분노한 시민들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조국에 분노했다기 보다
공정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은 이 사회의 민낯에 분노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문 정권에 새로운 세상을 기대했으나
조국 사태가 벌어지면서 갈 길을 잃은 것 같다.
아직 문 정권을 반대하는 것까진 아니지만
분노를 풀 길이 없자 조국을 희생양 삼아 이번 집회에 참가한 게 아닐까?

보수 집회에 수백만이 모였다는 건 심상치 않다.
그처럼 많은 사람이 함께 했다면
어떻게 모였든, 속 내용이 어떻든, 혁명적 사태다.
절대로 쉽게 보면 안된다.
중요한 건 '길 잃은 사람들'의 최종 선택이다.

나는 정서적으로 조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야당의 격렬한 비난과 조롱에도
처연하게, 또는 의연하게 버티는 모습을 보고
그가 좋아졌다.
이런 혼란과 갈등이 예측 가능했음에도
조국을 선택한 문 대통령에게도 되레 신뢰가 깊어졌다.

야당은, 또 일부 여권에서도 조국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조국 스스로 사퇴하거나 조국을 내치는 것.
이는 사실 쉬운 해결책이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상식이며 정치공학이다.
그 당연한 해법을 거절한 조국과 문재인이 나는 새롭게 보였다.
그리고 그에 기대를 건 것이다.
새로운 세상은 이전과 다른 길을 걸어야 열리지 않겠는가?

나의 기대와 희망에도 불구하고
이번 싸움은 문재인의 패배로 끝날지 모른다.
그러나 조국 사건이 끝나면
여하튼 우리 나라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 것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리고, 역사는 결국 진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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