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영농일기 2019/07/28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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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고추나무는 정리하기도 쉽지 않았다.
우선 그 많은 고추들을 처분해야 하고
나뭇가지와 뿌리들, 그리고 어지러이 널린 고추줄을
하나 하나 치워야 했다.
그러나 도무지 엄두가 안 났다.
맥은 빠지고, 머리는 백지같았다.

다행히, 마침 놀러왔던 지인들의 도움으로
밭은 대충 정리가 됐다.
고추는 이웃의 권유로 경매장에 냈다.
10kg 박스로 20상자, 200kg에 달했지만
돈은 10만원 밖에 안됐다.
김장고추를 풋고추로 낸 탓도 있지만
요즘 시세가 좋지 않단다.

친지들이 돌아간 뒤에도
밭에는 계속 나갔다.
남은 고추들마저 무너질까
지지대와 줄을 보완하고
휘어지고 부러진 가지들을 정리했다.

그러나 도무지 신이 나지 않았다.
아무런 의욕도 없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밭에 왔다 갔다 했다.
나도 모르게 한숨만 났다.

고추 농사가 아작이 나면서
이와 연관해 세웠던 계획들도 줄줄이 불투명해졌다.
당장, 건조기는 살 것인가 말 것인가?
내년에도 고추 농사를 지을 것인가?
유기농은 포기할 수 없다지만
무경운 농사 계획은 고수할 것인가?
그게 가능한가?

무엇보다,
나는 여기 왜 왔는가?
나의 귀농은 옳았는가?
시골에 왔다고 꼭 농사만 지어야 했는가?

혹시 나는 농사도 승부욕으로 짓지 않았나?
이 때문에 고추농사에 거의 올인하지 않았나?

농사는 승부가 아니다.
더구나, 내가 귀농한 것은
승부에서 떠나기 위해서였다.
무엇에 올인하기보다
다양한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무슨 짓을 한 건가?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나에겐 아직 한 고랑의 고추가 남아있다.
우선 여기에 집중하자.
그리고 귀농을 백지상태에서 재점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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