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리

영농일기 2019/07/23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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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사달이 났다.
고추가 반 이상 아작이 났다.
여기 저기서 '뿌지직' 가지가 찢어질 때,
고추줄 고리가 툭툭 튕겨져 나갈 때
알았어야 했다.
곧 큰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그러나 그 불길한 징조에도 난
'설마... 그래서 어쩌라고'만 되뇌고 있었다.

지난 금요일.
1시간 동안 미생물과 물을 주고
정기 방제가 거의 끝나갈 무렵
갑자기 하우스 한쪽이 환해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놀라서 분무기를 벗어버리고 뛰어가 보니
고추 한 고랑이 거의 전부 쓰러져 있다.

꺾이고 찢어진 가지들.
그런데 웬 고추가 이렇게 많이 달렸는가?
고추 크기는 또 왜 이렇게 큰가?

고추꽃이 벚꽃처럼 지고
수정된 어린 열매들이 어지럽게 떨어질 때
이러다 헛농사 짓는 거 아닌가 걱정했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이렇게 많은 고추가
이렇게 잘 크고 있었구나.
그래서 무게를 못이겨 가지가 찢어지고
고추줄 고리들이 툭툭 벗겨져 나갔구나.
그리고 게으르고 맹한 주인 때문에
끝내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구나.

이리 저리 일으켜 세우려 애를 썼지만
그때마다 줄기가 부러져 나간다.
어찌 해볼 도리가 없어 망연하게 서 있는데
이번엔 또 반대편 고랑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난다.
이게 대체 무슨 변고인가?
3고랑밖에 안 심었는데 두 고랑이 절단 나다니.....
갑자기 하우스가 휑하다.
머리 속이 하얗다.

쓰러진 고추나무를 혼자서는 어쩔 수가 없어
급히 아내를 불렀다.
소식을 들은 누이 동생이 함께 달려왔다.
쓰러진 고추나무를 보고 말들을 잇지 못한다.
함께 일으켜 세워 살려보려 했지만
금방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왕 벌어진 일, 더 이상 손 쓸 수도 없는 일,
과감하게 정리하기로 했다.
쓰러진 가지들을 사정없이 쳐냈다.

이파리 한 장만 떨어져도 왠일인가 걱정했었다.
꽃 한 송이 떨어져도 고추가 떨어진 듯 아까워 했다.
꼭지뿐인 열매라도
떨어지기만 하면 가슴이 철렁했다.
곯아버린 고추도 버리기 아까워
볼 때마다 액비통으로 주르르 달려가 넣었었다.
하루도 안 거르고 아침 저녁으로 애지중지 보살폈는데
고추, 이제 보니 아무것도 아니구나.

어른 손바닥보다 큰, 그토록 가상한 고추들이
수백, 수천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다.
발로 밟고 수레로 짓이기고....
흠집이 있나 살펴보기도 귀찮아
웬만한 건 다 그냥 쓰레기 더미로 던진다.

이렇구나.
그토록 소중했던 것들도
상황이 바뀌면 쓰레기만도 못 할 수 있구나.

이번 고추농사는 예사 농사가 아니다.
시험삼아 해본 작년 깻잎농사와 달리
오랫동안 준비해 야심차게 진행해왔다.
그런 만큼, 대박은 못 쳐도 실패를 해선 안됐다.
내가 농부로서 당당히 설 수 있음을
나 자신과 이웃에게 보여줘야 했다.
그런데 이 지경이 됐다.
이제 나는 어째야 하는가?

내가 조금 게을렀기로
고추들이 꼭 쓰러져야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운 좋게 극히 일부만 쓰러지거나,
그로 인해 내가 보완에 나섰을 수도 있다.
그런데 신은 왜 굳이 이렇게 하셨을까?
농사 그렇게 짓지 말라는 경고일까?
아님 너는 아에 농부가 되지 말라는 암시일까.

머리 속은 텅 비고......
무엇보다 아내에게 미안히다.
나를 믿고 시골에 내려와줬는데
얼마나 실망했을까?
나는 이제 어쩌면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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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창동 2019/07/30 13:30 PERMALINKMODIFY/DELETE REPLY

    아이코 이런 일이 있었군요.
    고추가 너무 크고 많아서 그런가요? ㅠㅠ

  2. 쥔장 2019/07/30 16:47 PERMALINKMODIFY/DELETE REPLY

    그러게... 고추 크게, 많이 기르는데만 신경 썼지
    그 무게를 어떻게 감당할지는 생각도 못했네.
    그건 그렇고, 잘 지내시는가?

    • 평창동 2019/08/01 18:06 PERMALINKMODIFY/DELETE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일도 열심히하고 낚시도 다니고 ^^
      더위 좀 가시면 고추구경 가야겠네요.

  3. 쥔장 2019/08/01 21:19 PERMALINKMODIFY/DELETE REPLY

    그려. 더위좀 가시면 한번 오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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