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서다

영농일기 2019/06/18 10:09
아무래도 올 고추 농사는 틀렸나보다.
일주일이 되도록 고추꽃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영양제도 줘보고, 액비도 투여했지만
꽃은 속절없이 지고
고추잎도 더 이상은 좋아지지 않는다.

내가 농사를 너무 쉽게 생각했을까?
올 농사는 나름대로 많은 준비와 노력을 했다.
작년 가을부터 천연 농약을 준비했고
올해도 일찍부터 땅을 고르고 미생물을 투여했으며
새 농법에 관한 많은 정보를 익혔다.

처음엔 잘 되는 것 같았다.
약간의 문제는 있었지만
고추들은 쑥쑥, 밝게 자랐다.
남들보다 우뚝하게 자란 모습에 뿌듯했고
남들이 문제를 제기할 때도
내심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곧 이상이 감지됐다.
잘 듣는 것 같던 천연 약재가
진딧물을 잘 잡지 못했다.
약물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진딧물에 직접 C단계 약물을 뿌리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봤다.
진딧물이 멀쩡하게 살아 돌아다니지 않는가?

이럴 수가!
약물 범벅이 되도록 치면 모르되
살짝 스쳐서는 효과가 없구나.
그래서 살아남은 놈들이 많고
몇일 뒤면 다시 번지곤 했구나.
매번 약물이 줄줄 흐르도록 쳐야 한다면
약해를 어쩔 것인가?
결국 자닮 농약의 장담은 허세인가?

D단계 약을 써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
초비상책인 가성소다를 섞어 뿌려봤다.
확실히, 분명히 효과가 있다.
그러나 이런 초고강도 대책은 위험하다.
약해 가능성이 몇배나 높다.
그렇다면.....결국 화학농약에 의지해야 하나?
유기농에 대한 자신이 갑자기 사라졌다.

꽃이 떨어지는 확실한 이유도 못 찾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봤지만
효과를 기대하긴 아직 이른가?
도무지 변화가 없다.
하체가 부실하니
아침 저녁으로 쓰러지는 놈들도 허다하다.
첨단 농법이라고 3단 적화를 했는데
그게 오히려 이런 부작용을 부른 건 아닌지.
조금 아는 게 화근이 된 건 아닌지.

유기농은 안 된다고,
유기농을 한다는 사람들도 실제론 슬쩍 슬쩍 농약과 비료를 쓴다고,
나에게 농약을 권하던 사람들을 나는 속으로 경멸했다.
나는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만일 농약을 쓰게 되면 절대 유기농을 주장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농사는 역시 현실인가?

농사는 낭만이 아니다.
그건 안다.
그러나 오직 돈 벌이가 목적이라면 왜 농사를 짓는가?
농사는 가성비가 꽝이다.
농사로 돈을 벌려고 하는 건 어리석다.
그러나 유기농이라면 무엇보다 명분이 있고
나라면 적당한 소득도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또한 낭만이었던가?

나는 다시 기로에 놓였다.
올 농사를 아예 포기할 것인가,
관행농법으로 돌아갈 것인가,
실패를 무릅쓰고 끝까지 해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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