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산행

한담 2012/05/20 10:07
점쟁이가 경고했던 4월도 지나고
눈도 비도 바람도 없는 이 날, 어제,
북한산 의상능선에 다시 도전했다.
지난번엔 나월봉에서 크게 우회했지만
이번엔 나월봉을 지나 나한봉을 거쳐 바로 대남문에 가기로 했다.

다시 가는 길이지만
의상봉에 오르는 길 부터가 역시 만만치 않았다.
도처에 기어올라야 할 암벽과 오싹한 절벽이 널려 있다.
조심 조심하며 올라가는데
쇠줄을 잡고 올라가야 할 좁은 길목에
수십명의 여학생, (여고생인줄 알았더니 여대생이더라)이 줄지어 매달려 있다.
보아하니 초보임이 확실하고 등산들을 할 차림도 아닌데
어쩌자고 이 길로 학생들을 데리고 왔는가?
선생이 미친놈이라고 혼자 욕을 하는데
이 욕을 들었는지 한 남자가 내 얼굴을 외면한 채
"애들아 조심해라, 발 확실히 딛고"를 연발한다.

학생들 때문에 발이 묶인 등산객들이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학생들 사이로 비집고 오르자
교수가 잠시 길을 터주라고 지시한다.
나도 그 틈을 타 학생들을 앞질렀다.
그 뒤로도 위험한 구간이 첩첩인데
학생들이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을지 걱정된다.
(다행히 저녁뉴스에 사고 소식이 없더라)

일단 의상봉 정상에 오르자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은 비교적 수월하게 건넜다.
이제 바야흐로 가장 위험하다는 나월봉.
'공격선'에서 비스킷과 우유로 몸을 추스린 뒤
'위험하니 우회하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과감하게 금줄을 넘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잔뜩 긴장해서 올라갔는데
두 세군데, 정말 짜릿한 곳을 만나긴 했지만
너무 싱겁게 나월 구간을 지났다.
금줄을 넘어 올라가다 금줄을 넘어 내려왔으니 제대로 온거 같기는 한데
가다보니 또 금줄이 있다.
이 금줄은 무슨 금줄인가?

긴가 민가 하며 가다 보니 나한봉.
아니, 내가 나월봉을 제대로 오르기나 한 거야?
(그건 지금도 모르겠다.)

나한봉을 내려와 문수봉은 단숨에 점령한 뒤
대남문으로 내려왔다.
북한산의 공룡능선이라는 의상능선을 종주한 것.
이제 부터는 하산 길이다.

지난번엔 이때부터 다리가 아파 너무 힘들었는데
이번엔 전혀 피곤한 줄을 모르겠다.
시간도 불과 3시간 반 정도밖에 안걸렸다.
느긋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간다.

계곡엔 그새 물이 말랐다.
비가 오지 않아도 넘쳐 흐르던 물들이 어떻게 된 것인가?
아마도 겨우내 얼음으로 갇혀있던 물들이
봄이 오면서 일제히 풀려 나오다가
이젠 바닥이 난 모양이다.
아우성치던 계곡이 소리도 잠잠하다.

그래도 비교적 물이 많은 곳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고 다리를 쉬다.

터덜 터덜 내려오는 산길.
오늘도 멍청하게 산행을 했다.
아무 생각 없어도 의식은 명료해야 하는데
의식마저 흐리멍텅........
잠시 바보가 됐던 기분이다.

노자는 남들이 보기에 바보같았다는데,
그 자신, 도를 아는 자는 바보처럼 보인다고 했다는데
나도 도를 아는 것인가?

아니다.
나는 정말 멍청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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