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 100일

한담 2010/04/06 10:22
술을 끊은지, 아니 줄인지 100일이 넘었다.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큰 일 나는 줄,
당장 숨이 끊어지거나 해가 하늘에서 굴러 떨어지기라도 할 줄 알았으나
여태 아무 일 없다.

내가 술을 마시지 않으니
처음엔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부자연스러워 했으나
이젠 대부분 익숙해지는 것 같다.
그동안 어떤 술이든 3잔 이상 마신적이 없다.
두번만 빼고.

한 번은 대전지역 전현직 사원 모임 때.
자리의 특성상 내가 호스트 역할을 해야 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폭탄주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고
이왕 만들었으니 돌아오는 폭탄주도 마실 수 밖에 없었다.
아마 폭탄주만 너댓잔은 마신 것 같다.

그러나 내 스스로는 한잔도 마시지 않았다.
그날은 2차도 단란주점으로 갔으나
그곳에서도 나는 양주 대신 생수만 마셨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내가 있거나 말거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때
슬며시 빠져나왔다.

두번째는 바로 얼마전.
서울에서 나처럼 파견나와 있는 직원이
갑자기 술 한잔 하자고 청해왔다.
그동안 점심도 가끔하고 술도 마시던 사람.
요즘 내가 술을 멀리 하면서 격조했었다.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러자고 했다.

그는 술을 마시며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놨다.
내년이 바로 정년인데, 밤에 잠이 안온다는 것.
듣고 보니 이 분의 인생역정도 만만치 않다.

그는 IMF때 정리해고 됐었다 한다.
모두가 순순히 회사 처분에 따랐으나
그는 법에 부당성을 호소했다 한다.
노조도 외면하는 싸움을 그는 혼자 치러냈으며
결국 복직했다고 한다.

그후 그가 어떻게 살았을 지는 묻지 않아도 빤하다.
그는 그의 원래 직종과는 전혀 상관없는 부서를 전전하다
지금 대전에 와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그런 투쟁적인 인상이 전혀 없다.
후덕한 얼굴에 늘 즐거운 표정이다.
그런데 이날 보니 뺨이 홀쭉해졌다.(나 만큼은 아니지만)
요즘 체중이 부쩍 줄었다더니,
정말 그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가 보다.

사실 그런 고민이야 나라고 덜 하겠는가?
나 역시 내년이면 정년.
앞으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 오래전부터 생각해왔지만
아직도 뚜렷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진솔하게 속을 털어놓는 사람 앞에서
마냥 앉아만 있을수도 없고,
나 역시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으로서
솔직히 술이 당기기도 했다.
그러나 소주 딱 세잔, 그리고 맥주 한병으로 참았다.

어려운 때일수록 강해져야 하느니,
세상만사 내 맘대로 안될수록 크게 웃어야 하느니.

지금도 가끔은 술 생각이 난다.
때론 막걸리나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면........
아니, 그럴 수는 없지.

내가 굳이 술을 절제하려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새롭게 서고 싶기 때문이다.

해 지는 들녘에 서있어도
아직 머리를 누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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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귀비 2010/04/09 15:32 PERMALINKMODIFY/DELETE REPLY

    해 지는 들녘에 서있어도
    아직 머리를 누일 수 없기 때문이다. .....................

    너무나 멋진 표현입니다......

  2. 허운주 2010/04/22 16:37 PERMALINKMODIFY/DELETE REPLY

    저 떠난 블로그에 객이 끊이지는 않아 다행입니다.
    술을 끊으셨군요. 저는 소폭만 좀 마시는뎅...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도는 것이 제 의지인지 바퀴의 의지인지 늘 의문만 품고 답을 얻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3. 방주 2010/04/23 10:35 PERMALINKMODIFY/DELETE REPLY

    오랜만이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더니
    이젠 눈도 뜨이고 코도 트이시는가?
    그래도 아직 뭐가 뭔지는 모르시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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